일본 정부는 8월 10일 항복 의사를 밝혔으나, 포츠담 선언 조건에 대한 미국 지도부의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수락했지만, 천황의 통치권에 대한 예외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무조건 항복 원칙과 상충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미국의 대응과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
제임스 번스 국무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항복 즉시, 천황과 일본 정부의 통치 권한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됩니다. 최고사령관은 항복 조건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일본 천황은 포츠담 선언의 조항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항복 문서에 서명해야 합니다. 일본의 최종 정부 형태는 일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8월 13일까지 일본의 응답이 없자, 트루먼은 니미츠와 르메이에게 “가차없는 압박”을 재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르메이는 8월 14일 일본 전역의 목표물에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828대의 B-29 폭격기 중 749대가 목표 지점에 도달했으며, 이오지마에서 출발한 186대의 전투기가 호위했습니다.
8월 15일 새벽, 홀시 제독은 항공모함에서 100명의 해군 항공대를 혼슈의 목표물로 파견했습니다. 한편, 천황은 항복 결정을 발표하는 칙령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8월 15일 정오에 방송될 칙령을 왁스 음반에 녹음했습니다. 8월 14일 저녁, 일부 강경파 장교들이 궁궐을 습격하여 음반을 파괴하려 했습니다. 8월 14일의 임무로 인해 궁궐을 포함한 도쿄의 조명이 꺼져 있었고, 이는 반군이 음반을 찾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본군의 항복과 스탈린의 야망
아나미 육군대장은 그날 저녁 자살했습니다. 워싱턴 D.C.에서 오후 6시 직전,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천황의 항복 결정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메시지는 천황이 포츠담 선언 조항 수락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으며, 정부와 대본영이 필요한 항복 조건에 서명하도록 승인할 준비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모든 군대에게 작전 중지 및 무기 반납 명령을 내릴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트루먼은 8월 14일 오후 7시 (괌 시간 8월 15일) 백악관에서 언론에 이 메시지를 발표했습니다. 칙령은 8월 15일 정오에 일본 전역에 방송되었고, 사이판, 티니안, 괌의 군사 기지에서도 동시에 방송되었습니다. 칙령은 국가가 하나의 가족으로서 미래 건설에 헌신하고, 정신의 고귀함을 기르며, 제국의 영광을 드높일 것을 촉구했습니다.
스탈린은 8월 7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는 즉시 홋카이도 침공을 명령했습니다. 이후 트루먼이 히로히토의 포츠담 선언 수락 결정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일본 전쟁의 전리품에서 배제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8월 16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홋카이도 북쪽 절반을 소련 점령 지역에 포함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은 이미 일본을 독일처럼 분할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트루먼은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의 모든 일본 섬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맥아더 장군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스탈린은 두 가지 이유로 일본 항복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은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는 유럽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항복식, 일본 포로수용소에 식량 공급, 그리고 일본 점령이었습니다.
원본기사: 마리아나 버라이어티 – 80 years ago today, Aug. 1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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