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제도의 존폐와 관련하여 크리스타 파이크, 니달 말릭 하산, 린지 클랜시라는 세 명의 살인 사건 주체들을 통해 정의와 형벌에 대한 깊은 고찰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50세의 파이크는 18세 때 동급생을 잔혹하게 살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최근 테네시주가 집행한 독극물 주사 형 집행이 실패로 끝난 바 있습니다. 56세의 하산은 전직 미 육군 소령으로 2009년 11월 텍사스주 포트 후드에서 임신한 군인을 포함해 13명을 총기로 살해하고 30명 이상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클랜시는 세 명의 어린 자녀를 운동용 밴드로 살해한 후 창밖으로 뛰어내려 생존했으나 하반신 마비가 되었으며, 사형 제도가 폐지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 사이에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전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응징적 정의는 아주 오래된 논쟁거리입니다. 사형 제도를 옹호하는 가장 약한 논거는 그것이 범죄를 억제한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처형 방식을 동원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살인과 흉악 범죄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 역사가 증명합니다.
결국 사형 제도가 명백히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감정적인 대응이라는 사실입니다. 살인 사건 앞에서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누구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언제나 완벽하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수록 사형 제도에 대한 회의론은 깊어집니다.
젊은 시절 아나스타시오 소모자 독재 정권에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고 아내를 잃었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지도자 토마스 보르게의 일화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혁명 후 아내를 죽인 군인과 마주한 그는 그에게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겠다며, 사면을 받고 새롭고 더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도록 허락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악을 행한 자들과 우리를 구별 짓는 철학을 보여줍니다.
알베르 카뮈가 단두대와 성찰에서 사형은 정의가 아닌 복수이며 그조차 동등하지 않은 복수라고 비판한 논거 역시 사형 제도의 부당성을 뒷받침합니다. 만약 정부가 완벽하게 진범을 확실한 증거로 처벌할 수 있다면 사형을 지지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추상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실제 살아있는 인간을 처형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맞이합니다.
테네시주가 처형에 실패한 크리스타 파이크의 경우를 보면, 변호인이 영화에서 인용한 대사처럼 사형수 명단에서 부유층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파이크는 양극성 장애를 앓았고 어린 시절 성폭행과 학대를 겪었으며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31년 이상 복역 중인 그녀는 테네시주의 처형 시도 실패 이후 폐렴과 혈전, 심한 부종 등으로 고통받았으며,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마땅합니다.
산후 정신병과 양극성 장애를 앓았던 린지 클랜시 역시 마찬가지로 종신형으로 복역해야 합니다. 범죄와 처벌은 매우 감정적인 문제이며 양측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을 펼칩니다. 결국 사형 제도에 대한 반대 입장은 죄인 그 자체보다는 우리 자신을 향합니다. 유무죄를 완벽하게 가려내지 못하고 부유함과 가난함을 차별하며 악과 질병을 구분하지 못하는 국가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은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가장하지 않고도 범죄를 처벌하는 수단이 됩니다.
원본기사: 마리아나 버라이어티 – To kill or not to k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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